마이크로소프트가 지난 20일 BUILD 행사를 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BUILD는 애플의 WWDC와 비슷하게 매년 열리는 행사로 윈도우와 하드웨어 플랫폼의 업데이트를 발표하는 행사입니다. 윈도우에 들어갈 새로운 AI 기능과 노트북 신제품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요. 앞으로 윈도우 에코시스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에 중점적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무슨 칩이 들어갔다고?”
신형 서피스 프로와 서피스 랩톱입니다. 두 제품 모두 이미 출시한 지 꽤 오래된 시리즈입니다. 서피스 프로는 11세대, 서피스 랩톱은 7세대거든요. 그리고 둘 다 기존의 폼팩터와 유사합니다. 서피스 프로는 태블릿이었다가 아래 키보드를 꽂아 노트북 같이 쓸 수도 있는 방식이고, 서피스 랩톱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평범한 랩톱 팩터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변화는 이 안에 들어간 칩입니다. 둘 다 퀄컴의 새로운 스냅드래곤 X 시리즈 칩을 탑재했거든요. 그리고 이 칩은 애플의 M시리즈 칩처럼 ARM 아키텍처 기반입니다. 두 모델 모두 인텔이나 AMD의 x86 아키텍처 기반의 칩 대신 ARM 아키텍처 기반의 칩만 탑재하고 나오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스냅드래곤 X 시리즈는 크게 기본형인 X 플러스와 고성능형인 X 엘리트로 나뉩니다. 둘은 CPU와 GPU 코어 구성에서 일부 차이가 있지만 한참 앞서 있던 애플의 M 시리즈 칩에 많이 다가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특히 고성능형인 스냅드래곤 X 엘리트는 애플의 15인치 M3 맥북 에어보다 지속 성능 면에서 최대 50% 더 빠르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주장입니다). 물론 X 엘리트는 M3보다 더 많은 성능 코어(4개 vs 12개)를 넣었기에 전성비는 M3에 뒤쳐지고, 두 서피스 기기 모두 맥북 에어와 달리 팬이 달려서 맥북 에어보다 과열로 올 수 있는 쓰로틀링(성능 하향 조절)에 훨씬 유리하다는 점은 감안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퀄컴이 PC용 칩에서 보여줬던 지지부진했던 발전 속도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낸 것은 맞습니다. 서피스 랩톱의 경우 인텔과 AMD 칩을 쓴 이전 세대에 비해 86%라는 엄청난 성능 개선을 이뤄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마이크로소프트가 AI 기능들을 강조하는 만큼 다양한 AI 연산 작업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도와주는 NPU 또한 초당 최대 45조 회의 연산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이번 달에 발표한 아이패드 프로에 들어가는 M4보다도 높습니다.
ARM 아키텍처를 탑재함으로써 얻는 또 다른 이점은 바로 배터리 지속시간인데요. 마이크로소프트가 자체적으로 만든 웹 브라우징 배터리 테스트에서 16시간 56분을 기록하며 역시 15인치 맥북 에어(15시간 25분)보다 1시간 반 가량 더 긴 배터리 지속 시간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새로운 서피스 라인업을 ‘코파일럿+ PC’라는 새로운 브랜드로 소개했는데요(코파일럿은 MS의 대화형 인공지능). 코파일럿+ PC는 이 날 발표한 윈도우의 새로운 코파일럿 기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PC를 가리킵니다. 사용자가 PC를 사용한 다양한 기록들을 보관했다가 AI로 정리하여 사용자가 나중에 검색해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리콜 기능이 대표적입니다.
현재 코파일럿+ PC의 요구사양을 충족하는 제품들은 스냅드래곤 X 시리즈 칩들을 탑재한 PC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날 행사에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새로운 서피스 라인업 외에도 에이수스, 델, HP, 레노버 등이 스냅드래곤 X 칩을 탑재한 코파일럿+ PC를 선보일 계획이고, 삼성 역시 스냅드래곤 X 엘리트가 탑재된 갤럭시 북 4 엣지를 발표했습니다.
“남은 숙제가 있습니다…”
하드웨어 면에서 드디어 윈도우 진영이 M시리즈 칩을 따라잡기 시작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아직 하나의 큰 산이 남아있습니다. 바로 기존 앱들과의 호환성입니다.
사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애플이 그랬던 것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윈도우 PC에 ARM 아키텍처 기반의 칩을 장착하는 시도를 계속했습니다. 2012년 윈도우 8이 출시할 때 ARM 전용 윈도우인 윈도우 8 RT와 함께 ARM 기반 칩을 탑재한 서피스 RT를 선보였죠. 당시에는 물론 ARM 아키텍처의 기술이 많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라 성능을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더 큰 문제는 기존 윈도우 PC의 x86 아키텍처를 위해 쓰인 앱은 하나도 쓸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자체적으로 쓴 내장 앱 몇 개를 제외하고는 PC로서의 구실을 전혀 못 한다는 얘기였죠.
그 뒤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이 실험을 계속합니다. 2020년에는 퀄컴과 함께 개발한 SQ1 칩을 장착한 서피스 프로 X를 선보였죠. 이때에는 처음으로 x86 앱들을 ARM 아키텍처에서도 구동할 수 있는 에뮬레이션 기술을 처음으로 선보였습니다. 애플이 M 시리즈 칩으로 맥을 전환하면서 x86 앱을 구동하기 위해 선보였던 로제타 2와 비슷한 원리입니다. 비록 성능은 로제타에 비교하면 처참했지만, 기존의 x86 앱이 ARM 아키텍처 기반의 하드웨어에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죠.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번에도 이 에뮬레이션 기술을 개선했다고 밝혔습니다. 윈도우 11 24H2 업데이트에 탑재될 새로운 에뮬레이션 기술인 ‘프리즘’은 기존 기술보다 20% 더 빠르며, 여기에 스냅드래곤 X 칩들의 개선된 성능을 합하면 거의 일반적인 시나리오에서는 이 앱들을 에뮬레이션 없이 돌리는 기존 x86 기반 PC보다도 빠른 성능을 제공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 외에도 400여 개의 앱이 ARM 아키텍처에서 에뮬레이션 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업데이트가 나올 것이라는 약속도 했죠. 하지만 윈도우에는 더 이상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일명 ‘레거시 앱’들도 상당하기에 이렇게 에뮬레이션 기술이 계속 발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C 역사의 대변혁이 진행중”
이러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움직임은 윈도우 PC, 아니 MS-DOS 시절부터 계속돼 온 PC의 역사를 봤을 때 엄청난 변화입니다. 애플은 맥의 40년 역사 동안 아키텍처를 세 번(68k → PowerPC → x86 → ARM)이나 갈아탔지만, 마이크로소프트가 이렇게 본격적으로 아키텍처를 갈아타는 건 사실상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모든 윈도우 PC의 조상이자 MS-DOS가 처음으로 탑재된 첫 IBM PC부터 x86 기반의 인텔 프로세서를 사용했거든요. 그간 마이크로소프트는 옛날에 쓰인 앱(혹은 프로그램)이라도 현 세대의 PC에서 원활히 구동되어야 한다는 철학 때문에 이러한 아키텍처 이주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졌지만, 애플이 M 시리즈 칩들을 통해 보여준 ARM 아키텍처의 이점을 마이크로소프트가 더 이상 좌시하고 있을 수는 없었겠죠.
물론 마이크로소프트와 퀄컴 모두 “올해가 ARM 윈도우 PC의 원년”이라는 주장을 그동안 잊을 만하면 해오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렸기에 (서피스 프로 X를 내놓을 때도 똑같은 얘기를 했었거든요) 실제로 이 기기들이 시중에 풀려서 이 주장들이 사실인지 검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PC 시장에서 x86 아키텍처가 여태껏 가지고 있던 독점이 무너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맥마저 x86 아키텍처를 썼던 14년 가량의 기간 동안은 정말 x86의 독주체제였다고 볼 수도 있었는데요. 이제 애플은 모든 맥 라인업이 ARM 기반의 M 시리즈 칩으로 갈아탔고, 이제 마이크로소프트도 스냅드래곤 X 시리즈 칩을 활용하여 본격적인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 물론 윈도우 PC의 아키텍처 전환은 맥만큼 빠르기는커녕 완전한 전환 없이 x86과 공존할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전성비보다 절대적 성능이 더 중요한 데스크톱에서는 여전히 x86이 강세를 보이고 있거든요. 하지만 전성비가 절대적인 노트북에서는 이제 ARM의 독주가 시작될 것이고, 노트북의 판매량이 PC 시장의 대부분인 현 상황에서 x86 아키텍처는 성능과 x86만을 지원하는 레거시 앱이 필요한 소수 사용자들에게만 환영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연 윈도우 PC에도 ARM의 바람이 불까요? 한 번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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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백수가 되었지만, 백수가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에디터이자 팟캐스터. IT가 메인이지만 관심가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 나는 편입니다.